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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시민운동가


성주신문 기자 / 입력 : 2019년 07월 16일

ⓒ 성주신문


설화 괴담 루머라는 제하로 이른바 '빵 루머'라는 설화를 지방지에 기고한 일이 있다. 프랑스 절대군주 루이16세의 왕비 앙트와네트가 시위 군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라고 해서 그게 사건의 기폭제가 됐다고 했는데 그게 루머였다고 최근에 밝혀졌다.

본래 그 말은 원래 프랑스 사상가 루소의 '고백록'에 나오는 예화의 일부인데, 루소가 이 책을 집필한 시기는 1766년이고 인용된 예화는 1740년대의 얘기였으니 앙트와네트가 태어나기도 전이어서 시기도 맞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비슷한 일들을 우리도 겪은 일 있다. 광주민주화 항쟁이 그렇고 FTA 쇠고기 파동 때가 그랬다. 특히 국가 중대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위가 격렬해져 '뇌 송송···' 등 루머를 넘는 악성 괴담이 들불 번지듯 했다.

삼국시대 설화도 현세에 와서 뒤집은 사례가 있다. 신라 진평왕 선화공주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백제의 서동(뒤에 무왕이 됨)이 이를 알고 연정을 품고 접근하려 꾀를 낸 것이 동요(薯童謠)를 지어 금성(경주)에 퍼뜨린 것이다. 이에 공주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다가 서동에게 발각되었고 그가 구출해 주어 가약을 맺었던 것이다. 이게 선화공주의 설화이다.

그런데, 2009년 백제 무왕시대에 지었다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해 사리함을 열어 보니 거기 사리함을 모신 봉영기(奉迎記)가 나왔다.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백제의 관직) 사택 적덕의 따님"이고,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이 석탑을 지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후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의문을 갖게 됐고 세기의 '로맨스'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조선조 초 유학자·정치인인 신수주. 그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거열형을 당하던 날 밤 집에 돌아왔다. 이를 본 윤씨 부인이 어찌 살아 돌아왔냐며 절의를 버린 남편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것이다.

그 괴담의 진원.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을 보면, 소설가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윤씨 부인 죽음이 비슷하게 기록돼 있는데 이는 송와잡설을 인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송와잡설은 선조 때 이기가 기자조선부터 당시까지의 역사·풍토·제도 등에 대해 쓴 시화만록집이다 이기는 사육신 사건 때 처형당한 이개의 후손이니 신숙주를 좋게 여길 리가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려실기술과 송화잡설의 저자들이 끄트머리에, '이 기록은 잘못 듣고 쓴 것이다. 신숙주 부인은 이미 5개월 전에 죽었다. 아마도 이광수가 두 저작물 끝부분을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라고 써 놓은 주(註)가 모든 괴담의 진원을 시원히 풀어준 것이다.

'숙주나물'의 이설은 또 있다. 신숙주가 녹두나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가 그 나물 이름을 아예 숙주나물이라 부르라고 명한 데서 나왔다고, 세종학교육원장 김슬옥 박사가 쓴 기고문에서 보았다.

일전 '국립4·19민주묘지'를 오랜만에 가보았다. 입구 가로변에 전에 없던 안내문, '김주열 1943.10.7~1960.3.15 시민운동가'가 있었다. 바로 '마산의거의 상징' 김주열을 '시민운동가'라고 써놓아 적잖이 놀랐다. 당시에는 그 말 자체도 없을 때인데 어쩌다 그렇게 썼는지 알 길이 없다. 굳이 명호를 붙이려면 '불의에 항거한 김주열 학생'으로 하면 될 것인데, 4·19를 보는 의식이 너무 안이하다는 말이다.

고교·대학생이 모두 180여 혼인데 나도 처음엔 적절한 명호를 찾기가 쉽지 않아 그래도 숙고 끝에 붙인 명호가 '시민운동가'가 아닐까도 했지만 이건 적절치 않다. 찾다 찾을 수 없으니 별 생각 없이 이른바 '편의주의' 발상으로 썼다면 이건 그에 대한 오욕일 수밖에 없다.

3·15 부정선거 때, 그 악명 높은 '3인조·9인조'로 처음 투표도 해본 경험이 있고 비록 시골서 농사지을 때였지만, 자유당 정권의 폭정도 눈으로 보았다. 대구 2·28, 마산 3·15 등 전국 각지 초교생으로부터 온 국민이 항거에 나섰다. 드디어 4월18일 고려대 교수들의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와 대학교수단 시국선언이 자유당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중앙 유력 일간지에 김주열군의 신상 기록을, 당시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김주열군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러 정읍에서, 이모할머니가 있는 마산으로 왔다.

시위가 있던 날 저녁 먹고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됐고 합격통지서도 받았다 한다. 어머니는, 시위자들을 무차별 구타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는다고 연못까지 들여다봤지만 찾지 못했다.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른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혼절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야말로 4·19의 기폭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4·19 의거의 우렁찬 함성이 이 강토를 휩쓸 때, 그 여리디 여린 열정으로 불의에 맞서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그를 송찬하고 미화하는 것을 누가 반대할까만, 역사에는 설화·루머도 있어 오랜 역사가 흐른 뒷날, '시민운동가'로는 '4·19혁명' 정신과 김주열군의 불의에 항거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순정한 진가가 훼손될까 걱정이다.
성주신문 기자 / 입력 : 2019년 0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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