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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향기] 진정한 부자

유미경 한국문인협회 광양시지부장

2019년 09월 27일(금) 16:53 [광양신문]

 

ⓒ 광양신문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어릴 때의 꿈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입술 위로 수줍게 소망을 담아 올렸다.

아, 이 사람도 여자였구나. 아무리 아니라고 밀어내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여자라는 이름. 그래, 이 사람도 여자였구나.

나는 놀라 그녀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나이 오십 셋에 누구에게나 할머니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늙어버린 여자. 평생 로션 하나도 못 발라 본 거친 피부. 반백이 되어버린 머리. 앞니가 하나도 없이 합죽하게 되어버린 입매. 어느 누가 봐도 영락없는 70은 넘은 듯 보이는 할머니였다. 거기에 구두 통을 이고 낡은 남자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 모습은 여자이기를 단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름다워지고 싶은 게 꿈이었다니. 너무도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온 몸에 전율이 왔다.

오십 삼년 동안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미장원에 가서 돈 쓴 적이 없고, 화장품을 발라본 적도 없고,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돈 주고 산 적이 없는 여자. 먹는 것도 아까워 삼일 밤낮을 굶으며 하루에 연탄 1800 장씩을 날리다 영양실조로 쓰러져, 서른 이라는 나이에 앞 이빨이 하나씩 빠져나가 지금은 할머니처럼 되어버린 여자. 날마다 구두를 닦아 번 돈이 은행에 자그마치 4억이나 들어 있는데도 그 돈이 아까워 쓰지 못하는 여자.

그녀는 말한다. 돈 때문에 워낙 포한(抱恨)이 져서 쓸 수가 없다고. 돈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한이 맺혔다고. 무용학원도 다니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피아노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아까워서 못 다닌다고 말하며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드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전혀 그럼 꿈이 없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여자이기를 포기한 사람 같았던 것이다.

난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너무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서 말했다. 이제는 돈을 쓰라고. 이(齒牙)도 해 넣고 예쁜 옷도 사 입고, 새 구두도 신고, 화장도 하고 머리 물도 들이고 나면 20년은 젊어 보일 것이라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소망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거듭거듭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도리질을 쳤다. 아까워서 쓸 수가 없다고, 피 같은 돈인데 어떻게 쓸 수 있느냐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들 아이 김치찌개 해 주고 싶으니까 돼지고기 조금 사 달라는 그녀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정육점으로 가는데, 뒤따라와서 남편이 좋아하는 막걸리 세 병도 함께 챙기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안타깝고 답답해 보였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이 만든 세상이 미워지기도 했다.

그녀는 분명히 물질적으로 나보다 엄청난 부자이다. 난 마이너스 통장에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어 서비스까지 쓴 상태이다. 그런데도 나는 부자처럼 살아간다. 작지만 내 소유의 차도 있고,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사 입기도 한다. 친구와 밥도 먹으러 다니고 분위기 좋은 찻집에 가서 차 향내에 젖어보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더 늦게 늙고 싶어 좋은 화장품도 바르고, 슈퍼마켓에 가면 내가 먹고 싶은 과자나 과일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취재하러 갔다가 형편이 어려운 것 같으면 원고료 받을 것으로 이것저것 챙겨주고 온다. 다음 달이면 또 돈이 들어오니까, 신랑이 월급 타니까, 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부린다.

그녀는 내가 죽을 때까지 만져보지도 못할 만큼의 액수를 은행에 넣어두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그녀의 돈일까. 친구가 말했다.

"그 아주머니는 절대 그 돈을 쓰지 못해. 평생 그렇게 살 것이야. 습성은 절대 못고치는 것이니까."

무일푼으로 시작해 박봉의 공무원으로 고만고만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친구가, 그녀가 먹고 싶다고 한 자장면을 사 주고 사과까지 한 상자 안겨 주는 것을 보고 나는 친구야말로 진정한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란 얼마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진 게 없어도 마음이 넉넉하면 부자이다. 그녀는 누가 봐도 가난하게 보인다.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기 돈으로 밥 한 끼 안 사 먹고 사람들한테 사 달라고 한다. 구두 닦을 손님을 찾으러 사무실로 갈 때마다, 책상위에 놓여 있는 요구르트나 간식을 얻어먹는다. 거기에서 벌써 마음의 빈곤을 얻는 것이다.

차가 부서져 공장에 가 있는데 돈 백만원이 없어 동동거리는 나를 보고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딸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해? 난 우리 집이 굉장히 부자인 줄 알았어,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

그 때 난 대답했다.

"우리가 돈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난하지는 않아.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면 부자인 거야. 그래서 우린 부자야."

딸아이도 맞장구쳤다.

"그래 엄마, 우리는 부자야 맞지? 그지?"

그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난 부자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쓰면서 살아가겠다고. 함부로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도 조금씩 하면서 필요한 곳에는 움츠려들지 않겠다고. 그것이 더 없는 행복이고 삶의 풍요로움이라고 내 자신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가을빛 가득 머금은 꽃무릇이 행인들의 눈길을 잡는 9월 하순, 나는 기도 한다.

그 녀가 하루빨리 자신만의 껍질을 깨고 나와 세상 빛 속에 우뚝 서기를. 어릴 적 꿈꾸었던 아름다운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를. 화장품도 바르고 예쁜 옷도 입고 구두도 사면서 여자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돈을 모아서 은행의 금고가 쌓이는 것보다 더없이 큰 행복이고 가슴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광양뉴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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