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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 서서

설주일(목사)

2018년 09월 14일(금) 18:33 [해남신문]

 

ⓒ 해남신문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한 서정주의「국화 옆에서」라는 시처럼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농부의 피와 땀으로 몸부림한 결과, 논과 밭에는 곡식들이 영글어 알곡이 되었습니다. 농부의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듣고 피땀을 먹고 자란 농작물입니다. 한 여름 세찬 바람과 모진 가뭄과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생명력을 불어넣어 일군 결과입니다. 종자를 고르고 논밭을 갈고 때를 따라 씨와 모종을 심고 가꾸며 풀과 병충해를 구제한 수고가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지난 여름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체감온도 40도를 넘는 고온 다습한 날씨,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에 파김치가 되어 꼼짝할 수 없는 날이 한 달을 넘겼습니다. 여름의 가뭄은 왜 그리도 길었는지 농작물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도 갈라지고 타들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태풍의 북상 소식은 또 하나의 가슴조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연의 현상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른 아침부터 해가 사라진 저녁까지 논밭두렁이 닳도록 들고났습니다. 그 농부의 두터운 손과 발로 만들어 낸 열매가 오늘의 황금들녘입니다. 비록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려 빛을 발하는 얼굴은 깊게 패인 이마의 주름과 함께 지난 시간의 고달픔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은 열심히 산 사람 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훈장입니다. 들판에 풍성하게 영근 열매를 바라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최고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농부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살기에 진실하고 당당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비록 외모는 허름하고 연약하고 볼품이 없을지라도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을 다 하고,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그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제자매입니다.

족자에 걸린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퇴색된 글귀가 오늘 우리의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오롯이 대변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그러나 국민의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농촌, 농민의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방송을 타는 농산물 가격의 상승 소식은 농부들에게 또 다른 고민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는 속담이 오늘 농촌과 농민의 현실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피땀 흘려 농사를 짓지만 생산비도 건지지 못한다는 푸념과 흉작에 농산물 가격이 올라도 그림의 떡인 현실은 농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게 합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다시 논으로 밭으로 발걸음을 쉬지 않는 농부는 천상 생명의 밥상을 책임지는 성자입니다. 하늘을 거역할 수 없는 농사, 현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농민, 농자천하지대본이라 말하지만 농사의 농(農)도, 농민의 민(民)도 존중받지 못해도 '땅을 놀릴 수 없다. 그것은 죄짓는 것이다.'라는 농부의 고백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믿음입니다. 그래서 금방 엉덩이 탈탈 털고 일어나 농기구 챙겨들고 들판으로 나가는 모습에 경건함이 있습니다.

농촌의 암울한 현실은 이 나라의 미래를 미리 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농업을 경시한 나라가 희망이 있을까? 밥 한 그릇의 쌀값 300원을 요구하는 농민의 절규 앞에 농산물가격 상승이 물가를 끌어올린다고 가벼워진 시장바구니 타령을 하는 나라가 희망이 있는가?

그래도 농부는 오늘도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을을 꿈꿉니다.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가을이 익어가지만 가을은 거저오지 않습니다.

해남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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