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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사 최지환 하판락은 누구인가

민족정기국회모임 친일 명단에 포함

2002년 03월 05일 [바른지역언론연대]

[진주=임수현 기자] 진주출신 일제경찰로서 가장 크게 출세한 최지환은 그의 친일상을 따질 필요도 없다. 그에 대한 경력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882년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1906년 일제통감부 진주경무서 순검이 돼 1907년 통감부의 군대해산령에 따라 진주주둔 진영대를 해산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목포경무서 경부로 승진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조선총독부 경부가 돼 1912년에는 합병공로를 인정받아 조선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그는 1917년 조선인 경찰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인 경시로 승진할 때까지 당진·삼랑진·동래·진주경찰서에서 근무했으며 1919년 평남경찰부 경시로 있을 때 3·1운동 진압에 수훈을 세워 1921년 충북경찰부 보안과장이 됐다.

1923년에는 경찰복을 벗고 음성군수로 전직해 영동 충주군수를 거쳐 1932년에는 도지사를 제외하고 조선인 행정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평북참여관을 지내고 퇴관했다.

그리고 조선인 귀족이나 이완용 같은 매국노 등의 특수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지위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주임대우정5훈5급)를 해방이 될 때까지 지내며, 그와 동시에 진주에 거주하면서 진주부회 의장을 비롯한 경남도회 의원, 진주신사 씨자총대, 진주육영회 이사, 진주기생조합 사장, 협성상회 사장 등을 지냈다.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그는 일본의 ‘후지산(부사산)’과 명치시대 정한론자(조선 무력정복론자) ‘서향륭성’의 이름을 따서 ‘부사산륭성(후지야마 따까모리)’으로 창씨개명했다.

그는 중추원 참의로 있을 때 1943년 11월 중추원에서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 징용키로 한다는 결정을 결의하는 등 진주지역 최대의 친일파로 이름을 날렸다.

(진주신문 374호. 97년 8월 11일자 8·15특집-일제 앞잡이 노릇한 진주의 친일 경찰들 '최지환 이성옥 김을도 등 수두룩' 중 발췌)

고문귀? 출향인사? 하판락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양군 명석면 관지리 관점에서 내로라 하는 집안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27년 진주제일보교를 거쳐 30년 진주고보를 졸업한 후 일제 경찰에 투신해 34년 순사부장, 37년 경부보로 승진하는 동안 관부연락선에서 동족을 수색하는 일부터 경남경찰부고등과 외사주임으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일까지 이른바 일제의 고등경찰로서 또한 고문귀신으로서 악명을 떨쳤다.

1949년 서울에서 간행된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주사기로 착혈하던 고문귀 하판락'은 '조선인 형사로서 가장 악질적인 친일귀였다'고 그의 악랄했던 죄상을 밝히고 있다.

그는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용서받지 못할 '고문귀'로 각인된 악질 친일파였다. 그에게 고문을 모질게 당하다가 숨진 독립운동가가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명석면에는 명석면협의회 의원을 지낸 그의 아버지와 명석면 부면장을 하던 일제관공리 큰형이 살고 있었다.

하판락이 우리 동족을 어떻게 학대하고 고문했는지 밝혀주는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중 고문을 당한 피해자가 느낀 비통한 심정이 하나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추방당한 호주 선교사의 후임으로 병원장이 된 것 때문에 미국과의 내통혐의를 받고 도경찰부에서 일본인 검사에게 취조를 받았다.

그런데 담당형사는 하판락이었으며 그로부터 일본인보다 더한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명석 유지 차남으로 출생
해방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미군정의 일제 관공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건재했다. 그는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일본인이 남긴 적산 처리에 관여했다. 1946년 6월 경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발령 받고 일제 고등경찰의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다가 그 후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남한 단독정부수립 후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자 이에 따른 반민특위 활동으로 그의 악독한 운명도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1949년 1월 그가 부산에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서울로 이송하던 당시, 부산시민들은 부두에 운집하여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고 애원을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인민의 뼈에 사무친 원한은 충천하였던 것이라 한다'고 「반민자 죄상기」는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조차 그에 대한 증인신문을 하고자 부산까지 내려와 "하판락 사건은 이번 증인신문으로써 결심을 맺고 언도 공판을 개정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하판락에 대한 증인신문을 끝내면 진주를 경유해 상경할 예정"이라고 밝힐 정도였다. 그에 대한 처벌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고 그는 역사의 심판으로 완전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명은 가혹하리만큼 비극적이었다.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되고 여느 친일파와 마찬가지로 하판락은 당당히 부활했다. 그는 서울까지 압송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처단에 대한 방해공작과 반민특위의 와해로 제대로 단죄 한 번 받지 않고 통탄스럽게도 그 해 8월 말 풀려났다. 반민특위가 한을 안고 막을 내린 것이다.

친일행적 재력으로 숨겨
석방 후 그는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에 거주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재력을 바탕으로 제도정치권에 진입하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다. 1956년 제2대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부산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진양군 제1선거구에 입후보하여 출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문중의 영향력과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하판락을 기억하고 있던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하판락은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뜻을 두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신용금고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금융업자로 변신하는 한편,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이 돈으로 그는 고향에 돌아와 명석면 청사를 신축하는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고향을 빛낸 출향 인사로 변신했고, 부산에서는 어버이날에 부산시장의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고문귀' 가와모토 마사오를 들먹일 수가 없었다. 오직 그에게 뼈 부러지고 살터지게 얻어맞아 평생을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던 독립투사 이광우 옹만은 예외였다.

(친일인명사전편찬소식지 「반성과 화해」2호(2001년 9월 1일자)-살아있는 친일파 '가와모토 마사오'중 발췌)

조대기기자  free3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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